전남대학교

GNB

서브 비주얼

동아리

  • home >
  • 학생자료&동창회 >
  • 학생활동 >
  • 동아리

최근들어 단과대학의 학부제실시로 학생들의 학부에 대한 자부심과 결속력이 부족한 상태이다. 학부제 실시와 전공화로 학생들의 지적이고 전문적인 면은 발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지식만의 대학생이 아닌 지성인인 대학생으로 갖추어야할 다양한 소양을 작춘 건강한 교양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필요로 한 것이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 더욱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게된 이유이다.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농과대학의 동아리 활동은 다른 단과대에 자랑할 만하다. 예전부터 존재해 온 농과대 동아리로는 밀알회, 4-H, 청년봉사회, 한국농촌문제연구회, 송란분위회, 농대 CCC등의 여러 동아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밀알회, 4-H, 청년봉사회, 한국농촌문화연구회의 4개 동아리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또 최근들어 여타 다른 분야의 신생동아리가 준비중이거나 인준 상태로 있어 농과대학만의 동아리로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다음은 갖아 역사가 깊고 전통을 지닌 동아리 소개 글이다.

밀알회

밀알 활동사항
밀알회는 1958년 5월 31일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생 7명이 모인 것을 시발로 40주년이 된 지금은 문공부에 국민운동단체로 등록되어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산되고 있다. 광주에 있는 중앙회에 연수원과 협동사회연구소가 있고, 청소년직업훈련을 위한 기술학원, 프랑스문화원인 알리앙스 프랑세즈가 있다.
2개의 지구회, 14개의 지역밀알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광주, 순천, 보성, 광양 등에 5개의 밀알신용협동조합이 있어 약 2000억원의 자산으로 밀알가족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16개 대학과 10개의 고등학교에 학생회가 있으며 산업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실업계 고교출신들의 밀알학우회도 활발하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모임들이 있어 어린이로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밀알가족을 구성하고 있다.
성경 요한복음 12장 24-25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는 말씀대로 한 알의 밀알인이 되자고 '밀알회'란 이름을 지었고 진실, 헌신, 순결, 창조의 정신을 지조로 하고 있다.
'인도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민족정신을 일으켜 새역사 창조에 기여하자'는 목적으로 인격수양활동과 농촌봉사활동에 주력했었다. 1960년대부터는 각 대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4-H연구반'을 '대학 4-H연구회'로 확대개편하는 등 학생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인도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민족정신을 일으켜 새역사 창조에 기여하자'는 목적으로 인격수양활동과 농촌봉사활동에 주력했었다. 1960년대부터는 각 대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4-H연구반'을 '대학 4-H연구회'로 확대개편하는 등 학생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에 3개년 계획으로 실시했던 화순군 청풍면 한지리의 지정마을운동은 재건국민운동의 자매부락운동으로, 마을문고설치와 농로개설, 무의촌봉사 등은 새마을사업의 아이디어로 기여한 바 있다. 또 1963년의 ‘밀알의 밤’ 행사는 밤행사 풍년을 이룬 계기도 되었다.
1964년에는 밀알졸업생과 일반사회인, 대학교수들까지 참여하여 일반밀알회도 조직했으며 1969년 광주밀알회가 창립되면서 지역사회단체로 정착되기 시작, 1970년에는 중앙회를 결성하고 1983년 2월 9일에는 문공부로부터 사단법인인가를 받았다.
1964년에는 밀알졸업생과 일반사회인, 대학교수들까지 참여하여 일반밀알회도 조직했으며 1969년 광주밀알회가 창립되면서 지역사회단체로 정착되기 시작, 1970년에는 중앙회를 결성하고 1983년 2월 9일에는 문공부로부터 사단법인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 가장 특기할만한 활동은 민주화를 위한 전략으로 전개해 온 신용협동조합운동과 구판장을 중심으로한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다.
이 외에도 백이산의 이상촌건설계획, 문흥동난민촌정착돕기, 1964년의 6·4(한일회담반대)단식데모, 취미교실, 단기학교운영, 산수동야간학교, 도서관설립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활동은 다양했다. 지금도 민주화의 정착을 위한 가족회의운동, 청소년육성을 위한 계획, 소비자협동조합 등을 계속 추진 중이다.
밀알회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과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한 조용한 혁명을 위해서 <밀알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형제들의 모임이다.
이제 <밀알회>들은 태평양시대의 주역으로서 한국의 발전과 세계평화의 이상을 향하여 정신운동, 문화운동, 경제운동을 펼치는 한국적 복지사회의 건설과 한국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차원 높은 구상들을 하고 있다.
밀알회 연혁
밀알회 연혁
1958년 5월 31일 전남대 농대학생 7명(강춘기·김영룡·정구선·오찬용·김안신· 장태규·김용혁)이 화장실 청소로써 출발
1960년 수양회 이후 함석헌·지명관·김정환·이을호·오병문 선생을 모신 가운데 수련회, 연수회 등으로 지속
1962년 3월 학교를 졸업한 회원을 중심으로 '일반밀알회'를 발족하여 지역사회운동으로 승화시킴
1963년 '밀알의 밤' 행사로 밤행사 풍년을 이룬 계기가 됨
1964년 6·4(한일회담반대) 단식데모
1969년 사회단체활동으로 낙도 어린이 초청
1960년대 그 밖의 활동으로는 3개년 계획으로 화순군 청풍면 한지리의 지정마을운동은 재건국민운동의 자매부락운동으로 마을문고설치와 농로개설, 무의촌봉사운동은 새마을 사업의 아이디어로 기여함
1970년 순천·목포·보성 밀알회가 모여 '밀알중앙회'가 창립되고 지역사회 시민단체로써의 기틀을 마련
1970년대 그 밖의 활동으로 무등산을 중심으로 전개한 자연보호운동 무공해식품 운동인 광주시 망월동의 밀알청정채소 원예단지조성, 밀알 20주년 사업으로 영호남교류와 광주지방 음악발전을 위하여 대구계명대 교향악단과 음악인들을 초청한 연주회 실시, '가곡의 밤' 등으로 지속, 백이산의 이상촌건설계획, 문흥동난민촌 정착돕기, 취미교실, 단기학교운영, 산수동 야간학교, 도서관설립 등의 활동 전개
1983년 2월 사단법인 밀알회 인가(문화공보부 제469호)
1985년 광양·정주 밀알 창립
1985년 12월 정관을 개정하고, 회명칭을 “밀알중앙회”라 칭함
1987년 부안·목포·목련·무등·해양·서광밀알 창립, 광주·전북지구회 창립
1989년 함평·광산·장성·곡성밀알 창립
1991년 김제밀알 창립
1993년 군산밀알 창립
1993년 8월 전주밀알 창립
1994년 4월 정읍밀알 창립
1995년 3월 27일 해남밀알회 창립
1997년 5월 2일 여수·여천밀알회창립
1999년 5월 고창기능대학(고인돌)밀알, 정읍정인대학(샘골)밀알 창립
2001년 4월 6일 제20대 강춘기 총재 취임
지도교수
김용식 교수(낙농학과) 퇴임
나진수 교수(축산학과) 작고
안장순 교수(원예학과) 현직
최종옥 교수(수의학과) 작고
민경수 교수(농 학 과) 현직
채정기 교수(임 학 과) 현직

청년 봉사회(SAY)

목적
본 회의 목적은 봉사, 교양, 친선의 기본 이념아래 각종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점차 비대해져만 가는 대학 사회에서 참된 봉사의 기풍를 조성하고 나아가서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며 교양 활동을 통한 성실한 자아육성 및 인격 함양을 도모하고 회원상호간의 친선으로 보다 참되고 보람된 대학 생활을 구현하는데 있다.
봉사활동의 기본 목표로써는 첫째, 대학생은 배우면서 봉사하고 봉사하면서 애국한다는 기본 자세로써 지역사회의 발전에 적극참여하며, 둘째, 대학생에게는 시대적 사명감과 사회적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부여하며, 셋째, 지성인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국민의 일체감 형성에 노력한다. 그리고 넷째로, 지역사회의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수련의 가치와 교육의 현장으로써 현장 실습적 효과를 취한다.
이 4가지 기본 목표 아래 청년봉사회에서 착실하게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연혁
청년봉사회는 봉사, 교양, 친선의 정신아래 이영국 외 6명의 광고동문이 모여서 1963년 5월3일에 조직하였다. 청년봉사회가 동아리로서 정식인가를 받은 것은 1966년이다.
청봉 설립초기에는 사회봉사활동을 기초로 하여 그 기반을 다져갔으며, 대한적십자사에서 나와 청년봉사회 순수모임으로 발전하였다. 1969년에는 청봉집 창간호를 발간하여, 청봉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도에는 응급처치 경연대화에서 우수 1971년에는 하계 봉사활동 우수동아리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75년에는 졸업선배님, 김우권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청봉장학회를 발족하여 지금까지 어어져 오고 있으며, 현 청봉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1979년에는 청봉회가와 마크가 제정, 1981년에는 전남대 모범동아리로 선발되어 황인수선배가 동남아 순방을 하였다. 1985년에는 봉사활동의 체계적인 운영과 조직적인 활동을 위해 자연대학 횐돌봉사반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한농, 농연, 밀알, 청봉이 참가하는 4개동아리 체육대회에서 여러번 우승하면서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한 청봉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계 봉사활동은 오래전 선배님부터 이어졌는데 초기에는 의료사업, 현재는 노력봉사, 교육봉사, 대민봉사를 주축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사회봉사활동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활동사항
매년 11월에 실시하는 정기 총회는 차기 정·부회장을 선출한다. 선출 후 익년 2월까지의 연수기능을 통해 리더로서의 지도력과 책임감을 배워나간다. 3월 정기총회에서는 차기 정, 부회장의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4개 동아리 체육대회에서는 신입생의 참석으로 동아리의 새로운 면을 보일수 있고, 청봉인으로써 하나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9월 정기총회에서는 장학금 수여와 정회원 인준식을 한다.
4개부로 나뉘어진 부들이 체계적인 일을 수행함으로써 아주 편안함을 준다. 4개부(봉사, 교양, 섭외, 안전)는 각각 청봉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회장단이 추구하는 일들을 해나간다. 청년봉사회는 4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과 회장단, 지도교수가 하나 되어 보람찬 생활을 해가고 있다. 청년봉사회는 이름과 청봉마크, 이념, 자세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언제나 젊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봉사와 밖으로 전진해 갈 수 있는 봉사를 겸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을 만들고 있다.
청봉인의 정신이라 하는 “교양, 봉사, 친선”은 봉사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할 덕목이다. 자기 자신을 회생하는 과정에서 내적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교양이다. '봉사'와 '교양'이라는 두 가지 사항을 실현함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면 다음에 추구해야 하는 인간관계를 '친선'이라 하겠다.
'봉사'와 '교양'이라는 뿌리를 더욱 건실하게 하는 것이 '친선'이라는 비료로서 청봉이라는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청봉인의 자세는 모든 청봉인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 “온다는 사람이 온다는 시간에 한다는 일을 하고 가는 데 있다.” 문법적으로는 어색한 면이 있다. 하지만 청봉에 대해서 느낀 사람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다. 시간엄수를 항상 머릿속에 두며 뛰어다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책임감있게 수행할 수 있는 청봉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문구이다.
동아리생활에 필요한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동아리에 대한 정, 사람에 대한 정이다. 어느 모임에서나 필요한 정, 정 뿐만이 아닌 봉사정신으로 뭉친 청년봉사회, 청년봉사회는 농대에서만이 아닌, 전대내에서 으뜸인 봉사동아리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에 만족해하지 않고 또, 어제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내일만을 우러러 보지 않는 그런 동아리가 될 것이다.

4-H 연구회

목적
4-H 연구회는 4-H이념인 건전한 민주시민의 양성을 신조로 하고 국가 현실에 비추어 우선적으로 이상적이면서 효율적인 농촌사회 건설을 위하여 제반 농촌문제를 연구 분석하여 농촌발전에 구현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적인 인재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더불어 산발적인 농촌운동을 지양하고, 농촌 청소년 문제를 체계적 지속적으로 종합하고 과학적인 태도로써 연구 분석하여 한국적인 4-H운동의 토착화와 민주화를 도모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연혁
1889년 미국의 일이노이주 맥쿠핀군의 강냉이 구락부가 제1차로 탄생되었으며, 1900년 AB크레임, NH벤손, 해밀톤 쟌하이슨씨 등이 오늘날의 O-H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구락부를 발족케 하였으며, 1907년 네잎 크로바에 4-H 구락부를 표시하고 4-H의 이름을 O-H. 벤손씨가 창안하였다.
전남대 4-H 연구회는 1961년 역사적 사회적 시점과 대학생의 위치와 사명을 재발견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농촌사회를 건설하고자 지성인으로서의 의욕이 싹텄으며, 어려운 한국 농촌문제 속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구체적인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기 위해 대망의 태동을 하게 되었다.
4-H라는 명칭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 '건강(Health)'의 네 영어 낱말의 첫머리자 H를 따서 이룬 말로서 "지, 덕, 노, 체" 네 방면의 건전한 발육, 발전을 농촌 청소년들에게 이룩하여 보자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즉 4-H는 지, 덕, 노, 체가 바로 4-H회원 자신들의 생활신조가 되며 동시에 이를 지도하고 있다.
'너와 나'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긍지와 자부심으로 동아리생활에 임하며, 또한 4-H인은 타의 의지로부터 탈피해서 자기를 확고히 정립한 다음 4-H운동에 참여를 통하여 자아를 발견하고 키우는 개인 활동이다.
즉 자기 변혁을 통한 인간개발로 4-H연구회의 기초를 확립해야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전남대 4-H연구회의 발전이 내일의 농촌을 건설하는데 실질적으고 현실적인 밑거름이 되어야 하겠다.
활동사항
전남대학교 4-H연구회의 슬로건인 “실행으로써 배우자”를 생활화하기 위한 것으로 여러 가지 연중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우선 대외적으로 전국지구 크로바 향연 및 호남 지구 크로바 향연을 주체 주관하며 각종 수련회와 연구 봉사활동에 역점을 두고, 또한 농촌문제를 연구하는 단위자체 연구회로써 현장을 직접 견학하고 문제점을 파악, 재인식하며 한해 동안 피와 땀과 정성을 다한 농민에 대한 보답과 농신에 대한 감사의 제배를 올리는 돌맞이와 한해를 총 결산하고 일년동안 회원들이 연구하고 길렀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크로바 향연 등 갖가지 연구 발표회와 회원들의 유대강화를 위한 수련회, 야유회 및 체육대회 등의 행사를 가지며 건전한 이념으로 완전한 인격형성을 위한 자기 완성적인 이념을 정립하고 또한 좋은 것을 더욱 좋게하며 실천으로써 배우자를 표어 아래 동아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농촌문제 연구소(한농)

설립배경
한국농촌문제연구회는 1974년 4월 19일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재학중인 신관표, 최영추, 최종식 등의 뜻있는 학생들이 4.19정신을 계승하여 당초 한국농촌문화연구회로 출범하였다. 농과대학 최원열 교수(현 학장)를 지도교수로 하여, 당시 군부독재의 암울하고 억압된 현실을 조명하고 이 땅의 억압받는 농민, 노동자 등의 민중에 대한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 농촌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농촌문제를 연구함은 물론, 아래와 같은 4대 목표와 생활신조를 제정하여 하늘의 축복과 땅 울림을 화답으로 힘차게 출발하였다.
4대목표
정신의 개조
민주의식의 앙양
합리적인 생활개선
농업의 현대화
생활신조
국가의 발전은 농촌으로부터 민족의 번영은 농민으로부터
토론이 아니면 근로로, 근로가 아니면 토론으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나 하나의 혁신은 전체의 혁신이다.
연혁
1974년 4월 19일 설립한 한국농촌문화연구회는 최원열 교수(농학과)를 지도교수로 위촉하고 초대회장에 신관표(축산학과), 1975년 회장에 최종석(농학과), 1976년 회장에 홍일문(임학과), 1977년 회장에 지의상(축산학과), 1978년 회장에 임봉빈(농학과), 윤영봉(임학과), 1979년 회장에 김영조(농학과), 1980년 회장에 김순진(축산학과), 1981년 회장에 임종문(농화학과), 1982년 회장에 오수택(축산학과), 1983년 회장에 김진웅(농생물학과), 1984년 회장에 유형근(농학과), 1985년 회장에 윤징하(농화학과), 1986년 회장에 김재탁(농공학과), 1987년 회장에 남임(원예학과), 1988년 회장에 김광범(농학과), 1989년 회장에 양야승(농경학과), 1990년 회장에 천정화(원예학과), 1991년 회장에 김남근(농학과), 1992년 회장에 김인식(농학과), 1993년 회장에 양덕렬(농학과), 1994년 회장에 김지영(농경학과), 1995년 회장에 김종호(임학과), 1996년 회장에 김종훈(농경학과), 1997년 회장에 심지영(농학과), 1998년 회장에 이홍래(농학과), 1999년 회장에 문준석(농경학과), 2000년 회장에 김종훈(농경학과), 2001년 회장에 김경렬(농학과), 2002년 회장에 김시훈(농경학과)에 이르고 있다. 최원열 교수의 외국 유학으로 79년, 80년 이재와 교수(농학과)와 김기청 교수(농생물학과)가 잠시 지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줄곧 최원열 교수가 지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1990년에는 그 동안 학생운동과 농촌문제에 역점을 두었던 사업목표를 농촌문제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 위해 동아리 명칭을 '한국농촌문제연구회'로 개칭하였다. 그 후 2000년 가을부터 동물자원학부 김광현 교수가 지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활동상황
4.19 정신을 계승하여 설립한 한국농촌문제연구회는 각종 수련회, 한농 축하제전, 체육대회, 하계봉사활동 등을 통하여 사업목표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19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에서 정의실현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부림쳤고 질곡의 시간들을 조금이나 빨리 걷어내기 위해 불굴의 투혼을 불태웠다.
설립 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19일에 실시되는 한농 축하제전에서는 1년 동안 연구한 연구논문발표회와 10명이 한 자리에 모여 낭송하는 연대시의 발표는 제전의 백미였다. 애절하면서도 긴장을 후려치던 포효는 광야의 선구자였고, 지금도 귓가에 울려주는 이성부 님의 전라도 “좋았던 벗님은 멀리 떠나고, 눈부심만이 내 방에 남아 나를 못살게 하네. . .”로 시작되는 구절을 회상하면 코끝이 울리고 모골이 돋는다. 나아가 이 땅에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외치는 해학과 익살스런 촌극의 모습은 모두가 웃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년 7월 하순에서 8월초에 9박 10일 동안 오지에서 이루어지는 하계봉사활동에서는 노동의 땀방울에 대한 신선함을 맛볼 수 있었으며, 학생들의 교육지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보람이었고, 마지막날 밤의 지역민들과의 한마당 잔치에서 주민들이 내 놓은 푸짐한 음식에 도취되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특히 81년 여름 해남군 황산면 황산 초등학교에서 실시했던 하계 봉사활동에서는 해남군에서 지원한 3대의 덤프트럭으로 장마 때면 장화없이는 생활이 곤란한 마을 진입로에 자갈길 포장을 해 주어 주민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는데, 급수사정이 안 좋아 눈병으로 전 회원이 고생했던 기억을 되새겨 본다.
언제나 이렇게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다 집시법과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동지(최영추, 김양례, 김영옥)들을 볼 때면 함께 한 동지로서의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으며, 특히 1979년 10월 26일 이후 끊임없이 이끌어 온 한농회의 학생운동은 1980년 5월 항쟁으로 더욱더 힘차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