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과대학 학도호군단
활동시기 | 1952 ~ 1960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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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194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학원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 양상을 보인다. 1946년 7월 3일 서울시내에 있던 각 관립전문학교를 통폐합하라는 미군정의 국립사울대한(세칭 ‘국대한’)에 대해 좌익계 조직인 ‘국민대한 반대 학생공동 투쟁위윈회’의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있었다. 그 후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등 큼직큼직한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학원내에서 좌우익은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여러 학생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자, 정부수립과 함께 문교부는 학생단체들을 통일시킬 방침을 구체화하여 1949년 1월 23일 ‘학도호국단 조직요강’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조직에 들어갔다. 그 해 국가 이념에 맞추어 통합시킬 목적으로 9월 28일 대통령령 제 186호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을 공포함으로써 학도호국단은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의 학생 조직체는 모두 해체되었다. 그 조직을 보면 대학의 경우 각 단과대학의 단장은 학장, 종합대학의 단장은 총장이 되고, 학생운영위원장을 각 단장이 임명토록 되었다. 따라서 학생의 자치적 성격은 매우 희박했다. 이에 따라 1952년 12월 전국 총학장 회의에서 학도호국단을 학생자치기구로 운영하도록 하자는 결의가 있어 이후부터 각 단과대학의 운영위원장은 학생들의 직접선거를 통하여 선출되었다. 역대 운영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
운영위원 | 1954년 박인현 (농 학 과) 1955년 정석준 (수의학과) 1956년 이도선 (농 학 과) 1957년 이민철 (농 학 과) 1958년 정성인 (농 학 과) 1959년 박동석 (수의학과) |
농과대학 학생자치회
활동시기 | 1960 ~ 1961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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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1960년 4.19 이후 최상채 총장이 자진 사퇴 한 뒤 5월 2일 학생들은 본부앞에 모여 학도호국단의 해체를 결의한다. 이어 5월 3일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 해체결의를 했다. |
운영위원 | 1960년 조무현 (수의학과) |
농과대학 재건 학생회
활동시기 | 1961 ~ 1963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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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1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학생자치회도 1년 만에 중도 하차하는 비운을 겪는다. 군사정부는 학생자치회를 학도호국단으로 환원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재건국민운동과 보조를 같이 하자는 묘안으로 ‘재건학생회’로 개편시킨다. 군사정부는 이내 일사불란한 통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건학생회 전국 연합회를 조직하려했으나 실패한다. 그렇지만 재건 학생회는 문교부가 아니라 재건운동본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광주에서는 1961년 11월 3일 광주서중학교 교정에서 재건학생회 결성대회가 있었고 그 임원들은 대부분 재건학생회의 임원이 유임되었다. |
운영위원 | 1961년 이승창 (임학과) 1962년 전판용 (농학과) 1963년 장석모 (임학과) |
농과대학 학생회
활동시기 | 1964 ~ 1975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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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5.16이후 학생자치회가 재건학생회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지만 재건운동본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상태였고 실질적으로는 문교부의 감독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3년 재건학생회의 회칙이 개정되어 ‘학생회’로 명칭이 바뀐다. 1964년 6.3사태 이후 학생들의 대 정부비판이 가열되고, 학생회가 이에 앞장서는 경우가 생기자 문교부는 학생회의 운영을 지도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학생회에 지도 운영회를 두어 학교당국이 학생회의 운영을 지도 감독 할 수 있도록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이러한 간섭에 반발하여 각 단과 대학이 대의원의장을 뽑고 이들이 총대의원회 임원을 뽑아 학생자치기구처럼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한편 1965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총학생회장이 구속되고 대부분의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사퇴하고자 하는 동요를 보이자 사실상 학생회의 기능은 활성화되지 못한다. 1971년 10월 15일에는 총학생회장 겸 상과대학 학생회장 김완호가 당시 이슈였던 7대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 및 교련반대, 고려대학교 군인난입사건 등의 규탄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정부에 의해 다른 대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학생회 공백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정부는 1972년 1월 18일 각 대학 실정을 감안한 단계적인 학생회활동을 허용하였고 각 대학의 회장을 지명하였다. |
운영위원 | 1964년 서동용 (임 학 과) 1965년 양승인 (농 학 과) 1966년 곽우식 (농 학 과) 1967년 허종석 (농 학 과) 1968년 김정환 (농경학과) 1969년 임평모 (농 학 과) 1970년 김병규 (농 학 과) 1971년 이종기 (축산학과) 1972년 조기호 (농경학과) 1973년 민상호 (농 학 과) 1974년 문형현 (수의학과) |
농과대학 학도호국단 재창설
활동시기 | 1975 ~ 1982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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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1974년 긴급조치 1호, 4호가 선포되고 민청학련 사건, 육영수여사 피격사건, 월남패망 등으로 학생운동이 심화되자,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빙자한 안보의식 강화를 위해 정부는 1975년 6월 7일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생군사 교육 편제의 일원으로서 학도호국단 재창설이 공포되었다. 학도호국단의 단위도 군대의 조직을 따라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하였으며 각 단과대학 3학년에 제대장을 두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되어 사망하자 전국이 민주화의 희망에 젖어들고 전국의 대학에서 학생회가 부활하려는 기운이 일어난다. 이에 정부는 학도호국단 개선책을 내놓는다. 1980년 1월 9일 김옥실 문교부 장관은 학도호국단 사단장 등의 임원 선임을 선거로 선출하고 상부 감독기관인 중앙 학도호국단을 폐지하며 군사교육기능을 호국단 기능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5.17조치로 모두 무산되었으며 그 해 2학기 개강을 앞두고 8월 26일 학도호국단 임원진이 결성되었다. |
운영위원 | 1975년 강석우 (축산학과) 1976년 최희동 (원예학과) 1977년 천기봉 (농 학 과) 1978년 김정철 (축산학과) 1979년 박종섭 (농경학과) 1980년 원순식 (임 학 과) 1980년 김용성 (낙농학과) 1981년 최명완 (낙농학과) 1982년 김준연 (축산학과) 1983년 정희함 (농생물학과) 1984년 이기섭 (농화학과) |
농과대학 학생회
활동시기 | 1985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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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내용 | 학생들의 독재정권 타도요구가 계속되자 정부는 1985년 학생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1980년대 반독재를 목표로 삼았던 학생들은 민주화와 노동해방의 모토아래 치열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반미운동의 확산과 민주화 운동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활발한 전개는 1980년대 학생운동사에서 논쟁이 되었던 사건으로 ‘무림학림사건’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무림’이란 안개에 가려진 숲처럼 베일에 가려진 노선을 가리키고, ‘학림’이란 제기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하는 노선을 말하는데, 198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대학 사이에서 불거진 역량 준비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 피주체로서의 학생운동은 1985년 무렵, C-N-P논쟁을 통해 사회운동의 주체로 섰다. 이후 여기서 NL과 PD가 분리되어 학생운동의 성격은 분명한 두 노선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NL계열은 이후 전대협의 주축이 되고 민족해방을 강령으로 1987년 6월 항쟁을 일으키는 주력이 된다. PD계열은 노동자 해방을 혁명의 최종 목표로 하여 막강한 국제자본과 열악한 노동인권쟁취를 기치로 하여 7, 8월 대투쟁을 전개한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자주적 학생회는 제기되기 시작했다. 자주적 학생회 노선은 기존의 전투적 학생회 노선 속에서 나오는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고 좀더 발전된 학생회를 건설하고자 제기된 것이다. 즉 전투적 학생회가 실천하지 못했던 여러 계층의 다양한 욕구와 부문별 운동을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1987년 서울지역대학을 중심으로 총 95개 대학이 모여 만들어진 전대협은 그 후 6년 동안의 발전을 거쳐 1993년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건과 함께 전국적으로 학생운동 탄압의 바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농대 학생회 또한 많은 구속자를 내면서 학생회 활동이 많이 위축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0년 지금, 주변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전남대학교는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고 있다. |
운영위원 | 1985년 민진기 (농공학과) 1986년 김종길 (농 학 과) 1987년 안원균 (농경제학과) 1988년 김 준 (농생물학과) 1989년 최집일 (농경제학과) 1990년 김재구 (농생물학과) 1991년 서순태 (조경학과) 1992년 박형대 (농생물학과) 1993년 임현재 (농경제학과) 1994년 조철진 (임 학 과) 1995년 김형택 (농생물학과) 1996년 정석춘 (농공학과) 1997년 김종훈 (임 학 과) 1998년 박장수 (동물자원학과) 1999년 이한수 (농경제학과) 2000년 김찬모 (농경제학과) 2001년 이정훈 (응용식물학부) 2002년 윤영일 (임 학 과) |